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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양자 역학의 핵심은 양자 도약이다. 전자電子는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 연속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거나 위치를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측정하는 행위가 측정 당하는 전자의 운동량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죽을 때까지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과학이 초고도로 발전했을 때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자의 위치를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보어는 심지어 전자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자는 측정 행위에 의해 실재하며 그 측정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교란하고, 측정의 결과는 전자의 본래 성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본래 성질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래, 아무것도 관찰할 수 없다면 전자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쯤 되면 아마 뉴턴 류의 고전 물리학에 익숙한 평범한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거다. 간만에 교양을 쌓기 위해 과학책을 집어 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개운하진 않다. 마치 안개 저편에서 경지에 다다르려면 더 공부하고 오렴이라고 보어가 속삭이는 듯했다.

2.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의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황 교수는 내담자의 성향을 몇몇 선택지를 통해 분석해내고, 마치 자신이 내담자 자신보다 내담자를 더 잘 아는 양 이것저것 묻고 답한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엄마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라며 고민을 털어놓는 내담자에게 박사는 당신은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자꾸 돈을 주는 거예요.’라고 답한다. 당장의 해결책은 주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해요.’ 황 교수가 매일같이 하는 조언이다. 놀랍게도, 길거리에서 도를 닦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이곤 한다. ‘당신 자신을, 나아가 조상님을 더 깊이 알게 해드릴게요.’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하고, 절에서는 자신의 숙업을 깨달아야 육근청정六根淸淨을 이룬다 한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다른 종교와 학문이 실제로는 비슷한 진리를 설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3.

      먼저 심리학이 준 숙제를 풀어보자. 바로 오늘 소개할 책 무경계No Boundary를 통해서 말이다. 저자 켄 윌버Ken Wilber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동서고금의 신비가와 학자들의 논리를 분석하여 /나 아님의 경계를 순서대로 배열한 의식의 스펙트럼을 완성했다. 각 수준은 아래에서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선, 이 책을 꿰뚫는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겠다. 처음에는 신상 정보를 이야기한다. 이름, 성별, 생년월일, 본적, 출신 학교. 그러나 늘어놓을수록 등본이나 이력서상에 떠다니는 글자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나아가 내 취미와 가치관을 이야기해본다. 조금 더 같다. 그러나 위 정보의 총합은 진정 인가? 나와 이름과 생년월일, 가치관이 같은 타인이 존재한다면 그는 인가? 물론 아니다.

      난 책을 좋아하므로, ‘책을 좋아하지 않음은 나를 이루는 요소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난 키가 작으므로 키가 큼 또한 나를 이루는 요소는 아니다. ‘책을 좋아함’, ‘키가 작음 등 내가 그은 경계 중 어느 한쪽의 요소가 모여 를 이룬다. 이에 관한 저자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일곱 색으로 구분할 수 없듯 우주에는 애초에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라는 성가신 것을 설정한 존재는 역시나 인간이다. 인간은 환경과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의 자아와 신체를 경계지으며, 자아 안에서도 페르소나와 그림자에 선을 긋는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대극이 생겨나 선과 악,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나뉜다. 인간의 번민은 이 대극 아래서 비로소 시작된다. 삶과 죽음을 구분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선과 악을 구분했기에 선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3.1.

      책을 좋아함이나 키가 작음 따위는 나의 매우 부분적인 특징만을 나타내는 부정확한 이미지이다. 사실 난 책을 좋아함과 동시에 어려워하고,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를 증오한다. 스스로 오픈마인드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것을 깨달을 때마다 화가 나고 외면하고자 한다. 이로써 외면한 부분은 나의 그림자가 되고, 다소 부정확한 책을 좋아함이란 자기상은 나의 페르소나가 된다.

      어느 날, 문학 동아리에서 다른 학우가 써 온 얼토당토않은 로맨스를 읽어야 했다. 첫 문장부터 읽기 힘들어 미뤄뒀는데, 친구 하나가 너 왜 안 읽어? 로맨스라 별로야?’라고 묻는다. 그 말과 동시에 내 안에서 불쾌한 감정이 가득 차오른다. ‘쟤는 왜 나를 평가하려 들지?’ ‘난 오픈마인드야!’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 친구가 나에게 로맨스를 읽으라고 압력을 넣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모든 압력은 투사된 충동의 결과이다. 사실 그것은 자신의 동인에서 나온 압력이다. 나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별생각 없이 뱉은 친구의 말을 고깝게 들어버렸을 뿐이다.

      저자는 그러나, 그림자를 마주하며 느낀 화남, 외면 등의 고통이 오히려 좋은 신호라 말한다. 자아를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분리한 상태야말로 괴로움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괴로움을 회피하지 말고 해결의 열쇠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불쾌감과 의식적으로 접촉하고 수용하여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내버려 둔다. 그리고 그 증상 자체의 모습에 지속적인 자각을 유지한다. 이것이 페르소나 수준 치료의 첫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의 치료는 해석/변환 작업으로, 앞에서 말한 황 박사 같은 정신분석 학자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끈질긴 작업으로 내담자가 대극을 직면하게끔 한다. 내담자는 끝없이 괴로움을 느끼고, 두 진영이 결국은 상호의존적임을 발견하며 그 대립을 수용한다.

3.2.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 대사의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일화를 강인한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 이야기로 읽는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 또한 그렇다. 가난하여 굶고 몸이 힘들어도 또렷한 정신으로 입신양명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동양인의 오랜 로망인 듯하다. 이렇듯 우리는 신체를 충동적이고 유한한 것으로, 자아를 고귀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신체는 노화와 죽음의 이미지에 직결되어 있으므로, 삶에 집착하는 인간은 신체를 외면하며 자아를 키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신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과는 다르게도, 인간은 자의로 신체를 움직이며, 때로는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긴장시키고 아프게 하면서 불편을 호소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꼬집으면서 누군가에게 아픔을 멈추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요가, 게슈탈트 치료법 등을 이용한다. 온전히 자신의 신체를 느끼고 자아와의 경계가 사라질 때 둘은 통합되어 의미 있는 실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죽음과 무상함 앞에서 위축될수록, 매 순간의 삶 또한 위축된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신체를 통합하여 켄타우로스 수준으로 나아가면 둘은 충만하게 각성되며, 그 경계는 해소되고 새롭게 일체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3.3.

      초개아의 영역으로 넘어가니 친숙한 이름, Carl Gustav Jung이 나를 반긴다. 융은 전 세계의 신화를 연구해 그 규칙성을 찾아내어 원형原型이라 칭했다. 원시적인 심상들은 개인을 초월하는 집단적인 것이며, 융은 이 정신의 심층부를 집단무의식이라 칭했다. 우리의 감정은 상당 부분 이 집단무의식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그 강력한 힘에 휩쓸리기 쉽다. 강렬한 우울함에 시달리는 사람은 삶 자체에 불안과 회의를 느끼는데, 이 경우 저자는 주시자가 되라고 말한다. 어떤 행위가 나타날 때 단지 그것을 주시하면서, 모든 괴로움의 한가운데서 다만 무선택적 자각으로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초개아적인 나는 무엇일까? 단일한 불사不死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앞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나와 이름, 생년월일, 육체가 모두 똑같은 도플갱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에겐 진정 전 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느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단일하다. 이 느낌은 신체를 초월해 존재하기에 불사이다.

3.4.

      의식의 스펙트럼의 가장 밑바닥, 합일의식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라마나Ramana의 말을 빌려 첫 장부터 맥빠지는 소리를 한다.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합일의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을 찾아 경험의 파도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과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을 획득하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합일의식의 가장 큰 역설이다. 사실, 누구도 합일의식에 도달하길 원하지 않는다. 계속 파도를 넘어 다니며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달아남은 현재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시간, 역사, 운명, 죽음에 투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끊임없이 달아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상황에 자신을 내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결국 자신의 저항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저항의 해소이며, 합일상태의 자각이다. 나라는 느낌과 달아남의 느낌은 동일하니 는 곧 저항감이다.

4.

      이제 양자 역학이 준 숙제를 풀 때가 되었다. 단일한 전자는 애당초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전 물리학자들은 분리된 사물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계산해왔으나 분리된 사물이 실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양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경계란 일종의 관습일 뿐이며, 실재를 측정해낸 결과물이 아니라 지도로 그려내고 편집하는 방식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끝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자연을 재단하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양자 역학을 둘러쌌던 안개가 한층 걷히고 조금 더 그 철학적 의미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경계는 심리학이나 철학, 종교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독해하기엔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저자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쓴 책인 만큼, 철학적 질문을 찬찬히 쌓아왔지만 산재한 책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분들에게는 해방구처럼 다가올 책이기도 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깨닫지 못했던 묵은 질문들을 해소하면서, 저자가 제시한 방법을 기꺼이 시도해보고자 하는 철학 중급자 독자들에게 무경계를 추천한다.


+ 미처 소개하지 못한 책 속의 문장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한느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 43쪽

성장은 외부와 내부 모두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문장이다.


신비가는 '현재 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 115쪽

지금 이 순간에는 '끝이 없다.' 끝이 없으니 불사이다. -116쪽

새벽 두 시 핀란드의 숲 속에서 바라본 백야의 초승달을 본 순간이 떠오른 대목. 나를 잊고 시간을 잊은 '무시간성'의 경험이었다.


마치 기억이 진정한 실체인 것처럼, 마치 진정한 자신의 진정한 과거를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얌전히 사로잡히고, 무조건 과거의 기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 141쪽

상담 사례를 듣다보면, 어떤 내담자는 현재 자신의 고민보다 과거 자신의 아픔에 집착하고 이를 되새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래서 현재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고민이 뭐죠?'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갖혀 사는 사람, 정말 많다.


ps. 이 책의 7장 페르소나 수준: 발견의 출발점(149쪽~)을 독자들이 가장 재미있게 읽을 페이지라 자신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다른사람에게 투사한다'는 설명은 내 혐오의 대상을 떠올리게 했다. 외모비하를 일삼는 방송을 나는 혐오하는데, 내 이면에는 외모비하를 어느 정도 즐기는 그림자가 있으며, 나의 일부분인 그 그림자를 나는 혐오한다. 그러나 내 안에 그와 같은 천박한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하기 싫어서, 외모비하 개그에 웃는 사람들을 나는 혐오한다. 자신의 그림자가 궁금한 독자들은 7장을 꼭 주의깊게 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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